6월 18일 목요일 QT


‘그런데’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15절부터 25절까지 이스라엘을 향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의 10-14절까지 보시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으며 풍요롭게 먹이시고, 마시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풍족하게 먹이고 마시게 하신 하나님을 저버렸다는 것입니다. 배부르게 되자, 살이 찌자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욕망할 때는 하나님을 바라보다가 욕망이 채워지자 다른 데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을 만드신 구원의 반석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그들을 미워하게 되셨다고 19절에서 말씀합니다. 쓸모없는 우상으로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셨기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분노가 일어나서 땅과 소산을 삼키고 불타게 하실 것이고, 밖으로는 칼이 안으로는 공포가 그들을 멸할 것이라고 22절에서도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이스라엘과의 연을 끊으려 하실 정도입니다.

그러나 26절에서는 갑자기 하나님이 이방민족들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의 힘으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으스댈까봐 이스라엘을 향해 다시 긍휼을 베푸실 것이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진노를 돌이키시고 이스라엘을 향해 은총을 회복하시고, 마치 자기들이 대단한 존재인 거처럼 자고하는 이방 민족들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긍휼하신 분이심을 증언하는 것이 모세의 노래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에게도 여전히 하나님은 긍휼로 함께 하실 것을 믿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는 저의 마음을 멈추게 하는 두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그런데’라는 단어와 ‘그러므로’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총, 축복을 풍성하게 받은 이스라엘의 부정적인 반응을 암시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 앞에 잠시 멈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용서)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치유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반복되는 인생이 우리의 인생인 듯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의 반복으로는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은총과 축복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의 반응, 응답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용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우리는)..” 이런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런데’의 신앙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 멈추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멈추게 하십니다. 그것이 심판입니다.

원미교우 여러분, ‘그런데’의 신앙이 아닌, ‘그러므로’의 신앙의 길을 가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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