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7장 11~26절
6월 2일 화요일 QT
율법을 새긴다는 것은 새로운 땅에서 다시 하나님과의 맺은 언약을 굳건하게 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재단을 쌓는 것 또한 새로운 땅에 들어가 가장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12지파를 반씩 나누러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게 하고,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게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에발산은 도시의 북쪽에, 그리심 산은 남쪽에 위치해 있고, 그 가운데에 세겜이란 도시가 있습니다. 세겜은 어떤 도시입니까? 시간을 쭉 거슬러 올라가서 보면, 하나님이 부르신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곳이 바로 세겜이었습니다. 후에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을 완료한 후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다시 언약을 갱신한 곳이 어디입니까? 세겜입니다. 그러니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처럼 첫 제단을 쌓고 거기서 하나님과 새롭게 언약갱신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특이한 부분이 있습니다. 본문의 주안점이 그리심 산에서 선포되는 축복 선언문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저주에 그 강조점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7장에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저주에 있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저주보다는 축복의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왜 저주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까요? 축복만이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주도 복음입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마음이 흥분되고 들뜨게 될 것입니다. 자칫 광야에서의 죄와 실수를 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공든탑이 무너지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시작도 하기 전에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그 들뜨고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기들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도록 돕는 역할, 그리하여 시편 1편 1절의 표현처럼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도, 죄인들의 길’에도 서지 않도록 하는 역할, 그리하여 복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 바로 저주의 선언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복을 받는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 얘길 들을 때 마음이 편하고 좋아집니다. 그런데 정작 ‘이렇게 하면 죽는다, 망한다’ 라는 얘기가 우리를 살릴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저주의 선언 때문에 금 밖으로 벗어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석회를 바른 돌에 새겨진 율법이 ‘아멘’을 고백하는 우리의 마음에 새겨지고, 그 새겨진 말씀이 어느 죄의 자리, 유혹의 자리에서 우리의 머리를 때리고, 의식을 깨울 때가 있다면, 에발산에서 선포되는 저주의 선언은 분명 우릴 살리는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축복을 받는 삶을 살다가도 한순간의 유혹에 저주받을 짓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막도록 하는 역할이 바로 저주의 선포입니다. 에발산에서의 저주 선포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유지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에발산에 다듬지 않은 돌 제단을 세우라고 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는 자리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도 생명과 죽음, 복과 저주의 말씀, 그리고 그 길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 지켜보지 않더라도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죄를 짓지 않고, 누군가 보지 않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을 낳는 믿음의 식구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