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0일 금요일 QT


오늘 시편도 다윗의 시편입니다. 그런데 읽다보면 시가 두 부분으로 나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시의 화자가 바뀌는 구간이 있습니다. 바로 12절부터입니다.

1절부터 11절까지는 ‘나’가 화자입니다. ‘나의 반석(1절)’ 2절에서도 ‘나의 사랑 나의...’ 2절의 ‘내가’, 7절과 11절에서도 ‘나를’이라고 말하는데,

12절부터는 ‘우리’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왕이 제사에 참여하여 드리는 제의문의 성격일 수 있습니다. 1절부터 11절까지를 왕이 찬양하면, 12절부터는 예배에 참여한 회중들이 화답하는 형식의 시편일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시편의 찬양 내용은 이방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고 12절부터 회중들이 장래에도 축복해 주시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1,2절은 과거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찬양을 드리는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손을 훈련시켜 전쟁에 익숙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이요 요새요 산성이시오 건지시는 이시오 방패이신 하나님께서 뭇 백성을 자기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셨다고 찬양합니다. 이것은 과거에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찬양을 드리는 중에 다윗은 자신을 돌아봅니다. ‘자기가 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자신과 같은 인생을 하나님은 이토록 깊이 생각하여 주시는 걸까?’ 감사하고 감격해합니다. 그 감사와 감격의 정도가 어느 정도일까요?

3절에 나오는 단어들을 통해 살펴본다면, ‘인생’이란 단어가 중간에 나오는데, ‘벤 에노쉬’ 사람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창4:26에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에노스라는 이름이 여기에 쓰인 인생에 사용된 단어와 같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에는 연약함과 소멸할 수밖에 없는 유한함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생각하시나이까’라는 말은 ‘묵상하다, 계획하다’라는 의미의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 단어는 어느 순간 갑자기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랜 시간 생각하고 계획해낸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결국 얼마 있으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자신과 같은 허무한 존재에게 하나님은 왜 그리 깊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대하시는가 라는 감격의 의문을 담은 고백입니다. ‘염치없고, 갚을 길 없어 죄송하고, 그러면서도 너무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각하시는 마음이 그와 같음을 다윗은 우리에게도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은 다윗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신 것은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도 자기 하나님으로 삼았으니 우리들도 복된 백성임을 믿습니다.

그러니 더욱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세상에서 존귀한 사랑을 받는 자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뭐라 하든 저와 여러분에게서 그분의 사랑을 빼앗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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