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0편은 다윗이 노래한 시편입니다. 부제에 성전 봉헌을 위한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개인적인 구원의 경험을 노래한 시편인데, 후대에, 아마 스룹바벨의 성전일 것으로 추측되는 제2 성전을 봉헌할 때 당시의 유대 백성들이 다윗의 이 시편으로 찬양을 드린 것입니다.

아마 페르시아 수산성에서 에스더 시대에 하만의 계략을 뒤집어엎으시고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경험한 유대인들이 이 시편을 읽으면서 큰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특별히 11절의 표현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라는 구절이 에스더 9:22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라는 말씀과 의미상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포로 귀환한 백성들이 이 시편을 성전 봉헌식에 불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럼 30편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1-3절은 다윗의 과거의 구원경험에 대한 기억입니다. 수렁에서 건져주신 하나님, 원수가 비웃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 부르짖었을 때 고쳐주신 하나님, 스올에서 끌어올리시고, 살리신 하나님에 대한 과거의 경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감사해서 사람들을 향해 성도들아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거룩하심을 기억하고 감사하라고 힘껏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노여움은 잠깐이지만 그분의 은총은 영원하고, 저녁엔 울지만 아침이 오면 기쁨이 회복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6-7절에는 자신의 잘못된 과거도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평안할 때, 잘 되고 있을 때 ‘내가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라’고 자신의 평안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며 오만했던 적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렇게 오만했을 때에 하나님이 자신을 외면하시자마자 그만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는 고백입니다.

자신의 평안, 형통의 근원이 다윗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는 것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잊었던 것입니다.

그때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주께 엎드려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도와달라고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드린 기도가 9-10절입니다. 새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죽은들 주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내가 죽어 구덩이에 던져지는 것이 주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한줌의 티끌이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한줌의 흙이 주님의 진리를 전파할 수 있습니까? 주님 귀를 기울이시고 들어 주십시오.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주님께서 나를 돕는 분이 되어 주십시오.”

그러자 11절에서처럼 주님은 슬픔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시고 상복을 벗기시고 나들이옷으로 갈아입히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영혼은 잠잠할 수 없어 주님을 찬양하고 영원히 감사하겠다는 고백을 드리고 있습니다.

포로기 유대 백성들의 심정과 아주 유사한 경험을 그들의 선조 다윗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을 성전봉헌식에 불렀던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경험은 그들만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도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잘 될 때, 은혜가 부어질 때 교만하게 행동하다가 큰 코 다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잘 될 때 오히려 더욱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사는 법을 배워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압니다.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할 것은 감사와 찬양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의 입술에 찬양과 감사가 가득 고백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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