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이 하나님이 행하신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극도로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위로를 기대했던 친구들에게서 책망을 듣게 되면서 마음에 깊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일어난 결과만을 보고서 욥을 판단했습니다. 사람이 망하거나 고통에 떨어진다는 것은 죄의 결과일 뿐이라고 판단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욥에게도 똑같이 적용하여 말한 것입니다. 결국 엘리바스의 입에서는 위로가 아닌 책망과 훈계가 가득한 말이 쏟아져 나온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 욥이 깊은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말이 입힌 상처는 칼이 입힌 상처보다 깊다는 말처럼 엘리바스의 말이 그러했습니다. 결국 욥도 친구들을 향해 거친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욥은 자기 친구들이 진정한 친구라면 고난 받는 자신에게 동정이라도 보여야 할 텐데, 그저 개울물처럼 그냥 흘러가 버리는 존재같다고, 날이 따뜻해지면 녹아내리는 얼음처럼, 쉬이 사라져버리는 존재 같다고 깊은 실망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친구들이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너무나 서운한 나머지 22절 이하에서는 욥도 그들을 향해 찌르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내가 재산을 떼어달라고 했느냐? 적의 손에서 구해 달라고 했느냐? 폭군의 손에서 건져달라고 했느냐? 왜 나에게 책망을 하는 것이냐? 내가 너희들 앞에서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느냐? 내 혀에 불의가 있었던 적이 있느냐? 자네들은 고아를 놓고 제비뽑아 팔아넘길 자들처럼 굴고 있는 거 아나?” 욥의 입에서 아주 거칠고 독한 말들이 뿜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이 심한 고난을 당하게 되면 그 속에서 철저하게 고독해지고 외로워집니다. 자신만 당하는 고난이라는 생각에 깊은 절망감과 낙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곁에 있어 주는 존재가 친구입니다. 친구란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시면서 다시는 죄를 지시 말기를 당부하신 예수님의 마음도 친구의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친구는 허물없는 돈독하고 친밀한 관계지만, 고난의 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허물없는 사람이 친구가 아니라, 진정한 위로가 되어 주는 사람이 친구인 것입니다. 욥도 그렇게 해 주길 기대했던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욥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낙심한 자가 하나님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비록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고통스런 일을 당한 친구에게는 동정을 베푸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말입니다. 그때야말로 진짜 친구가 필요한 때라는 말입니다.

‘동정’이란 말은 ‘헤쎄드’를 번역한 말입니다. ‘헤쎄드’는 변함없이 한결같으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욥이 친구들에게 그런 마음을 바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판단하고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분석하기고 해결책을 내놓기에 바빴습니다.

판단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아픔을 당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친구로 서 있어야 합니다. 아픔을 당한 사람을 볼 때 그같은 마음을 품는 사람이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성도가 영혼을 살리는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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