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아래에는 로마의 병사들이 예수님의 겉옷을 취하여 네 몫으로 나누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시고 그 위에 달리셨는데,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조차 조금이라도 한몫을 챙기려고 죽어가는 주님의 겉옷을 네 깃에 나눠 한 깃씩 취합니다. 그리고 속옷은 이음새 없이 통으로 짠 것이어서 나누기 어려우니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이 취합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당신의 죽음 앞에서조차 자기에게 어떤 이익이 있을까를 따지는 이들을 보면서 ‘저런 이들을 위해 죽을 가치가 있을까’라는 혼란스러운 마음이, 주님은 아니셨겠지만 저 같으면 들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님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네 삶의 모습이 예수님의 죽음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님의 희생은 그 자체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무게를 상징하는 것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십자가 아래의 성도들의 삶이 예수님의 희생의 피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삶이 세상에 주님의 희생의 가치를 그대로 드러내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죽어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제자 요한과 세분의 마리아, 즉 어머니 마리아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주님의 이모라고 기록된 여인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어머니를 향해 요한을 아들로 여기라고 부탁하며, 요한에게는 자신의 어머니를 보살펴달라고 부탁을 하고 계십니다.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고통스러운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슬픔에 젖을 어머니를 사랑하는 아들로서의 모습이 보입니다. 얼마 후 주님은 돌아가시기 직전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남기시고 숨을 거두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성경을 응하게 하려’ 라는 구절이 몇 차례 나옵니다.

주님이나 주변의 사람들이 행하는 행동들이 이미 오래전 성경에 기록된 것을 이루시려는 것이었음을 요한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오심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사건임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 사건이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 속에 이루어진 것임을 요한은 우리에게 알게 하고자 하십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께서 하신 일은 ‘끝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순종입니까? 당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드리기 위한 순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성취되도록 하기 위해 다 순종하셨다는 것이며, 그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순종은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고 통로입니다. 우리의 순종 또한 그러하여야 합니다. 그 순종이 나의 유익과 안녕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통로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 그 순종이 우리에게도 복된 열매를 가져다 줄 것이라 믿습니다.

고난주간 마지막 날 주님이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신 이날 우리의 순종을 돌아보고, 또한 재결단하는 귀한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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