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일 목요일 QT


오늘 1절에 예레미야가 예언을 받은 것이 여호야김 왕 때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예언은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왕 때 받은 것입니다.

예언의 내용은 멍에와 줄을 만들어 예레미야의 목에 걸고 시드기야 왕과 예루살렘에 온 다섯 나라의 사신들에게 그 멍에와 줄을 주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이 다섯 국가들은 바벨론에 대항하기 위해 유다와 동맹을 맺으러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그 멍에와 줄을 주면서 유다를 비롯하여 다섯 민족이 모두 바벨론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을 알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유다 시드기야 왕이나 사신을 보낸 다섯 민족의 왕들이 바벨론을 섬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를 통해 바벨론의 지배를 수용하라는 메시지를 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벨론의 지배를 받아들이면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나지 않고 농사도 지으면서 살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바벨론에게 대적하게 되면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고, 기근과 칼과 전염병으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모든 땅을 주셨고, 들짐승들까지 주어 그를 섬기게 하셨으니 그 땅의 기한이 이르기까지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난감한 예언입니다. 자기 왕과 왕을 찾아온 주변 국가의 사신들에게 그와같은 예언을 어떻게 전하라고 이런 어려운 사명을 주시는 건지 예레미야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사명을 떠안은 것입니다. 유다 왕과 백성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예언입니다. 환영받지 못할 뿐 아니라 자칫 비난받거나 미움 받아 죽을 수도 있는 예언입니다.

어느 누구라 하더라도 전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예언을 전하는 예레미야의 마음이 참으로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정해지셨으니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예언을 전하러 가는 예레미야의 마음에 ‘이런 상황이 오기 전에 회개했었어야 하는데, 그토록 말을 듣지 않더니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되는구나.’라는 탄식이 절로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의 나라 지배를 받는 것이 얼마나 억울하고 괴로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유다가 져야 할 바벨론의 멍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난 삶에 대한 징계이기에 지지 않을 수 없는 멍에였습니다.

멍에 자체는 자유의 박탈이며 속박입니다. 더군다나 남이 씌워주는 멍에는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유다가 이런 결말을 안게 된 것은 하나님의 법을 떠나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삶을 간섭한다고 순종하기를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한 후에는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멍에를 메고 사는 것이 훨씬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이었다고 후회하게 되죠.

예수님도 멍에에 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11:30)’.

우리가 지려는 인생의 짐, 남이 씌워주는 인생의 멍에,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합니다. 그리고 그 힘듦은 대부분 과한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멍에와 짐쉽고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멍에와 짐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 계명이며, 그것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이것을 지는 것이 쉽고 가볍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멍에와 짐을 지고 살아가고 계신가요? 나의 짐과 멍에입니까? 세상이 주는 멍에와 짐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짐과 멍에입니까? 유다는 세상을 향한 제사장 나라로서의 짐과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멍에를 지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멍에와 짐, 이것을 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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