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4일 금요일 QT


11절까지는 시드기야를 포함하여 사신으로 온 다섯 나라의 대표들에게 전하시는 예언의 메시지였다면, 오늘 본문은 오로지 시드기야 왕을 향한 예언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도 다른 민족들과 같이 바벨론을 섬기지 않으면 칼과 기근, 전염병에 죽을 것이라고 경고를 합니다. 더불어 거짓 예언자들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기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시지 않으셨으나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들은 것처럼 왕과 백성들을 현혹하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거짓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는 자들에게는 멸망이 주어질 뿐임을 상기시키면서 왕이 거짓 예언자들로부터 분별있게 판단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왕과 백성들은 거짓 예언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더 많이 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메신저들은 꽤 많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무언가를 전달합니다.

그러나 그중에 진정 하나님이 보내신 이들은 얼마나 될까요?  보냄받은 사실도 없는데 왜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이 보내신 것처럼 속이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가장 큰 권위자의 이름을 빌어야만 자기가 하는 말에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일 것이라는 유혹 때문입니다.

아이들도 자기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안 믿는 것 같이 느껴지면, 흔히 ‘내가 하늘에 두고 맹세한다!’라는 말을 종종 합니다. 결국 자기 얘기를 하려고 거룩하신 분의 이름을 가볍게 들먹이게 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런 이들에게는 멸망이 주어질 뿐임을 단단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거짓 예언자들의 말에 넘어가게 되는 걸까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평화와 축복을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싫은 소리, 불행한 소리는 듣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소리도 듣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거짓 예언자들은 책망과 회개를 촉구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죄가 있고, 부정한 것들이 사라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괜찮다.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라고 거짓으로 평화를 전하고 성공을 약속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의 이야기가 듣기 편하고 마음에도 흡족하니까 빠져들게 됩니다.

비록 자신이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잘 되기를 바라는 욕망이 우리들 안에는 존재하기 때문에 자주 이런 이야기에 넘어가 버립니다. 결국 욕망과 욕망들이 만나 거짓이 일어나고 또 거짓에 놀아납니다. 어찌보면 나의 욕망 때문에 거짓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징계의 말씀도 축복의 말씀으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으로 나아가길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드기야는 그 음성을 귀기울이지 않아 결국 화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책망의 말씀에 귀기울여서 죄에서 떠날 수 있게 된다면 결국 그것은 내게 복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악한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책망의 소리를 분별하여 듣는 것이 결국 우리에게는 복이 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등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