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은 어제 읽은 12절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생명과 은혜를 주시고 자기를 보살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13절에서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생명을 주시고 보살피셨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 그게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해칠 생각을 품고 계셨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 나에게 잘 해 주시나 했더니 결국 이렇게 죽기까지 괴롭게 하시기 위해 그러셨군요’라는 조소어린 고백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에 대해 품고 있는 마음은 거의 배신감 수준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뉘앙스입니다.

욥은 자신이 죄를 짓나 안 짓나 지켜보고 있다가 마침 트집거리를 발견하셔서 하나님이 내리치시는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을 꽤나 깊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차리라 죽었으면 좋겠다고, 아예 태어나지 말게 하셔야 했다고 탄식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조금이라도 좀 내버려달라고 간청합니다. 잠시라도 쉴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죽음으로, 어두컴컴한 땅으로 내려가기 전에 그렇게 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욥의 신앙이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에 대해서도 주의 뜻으로 받아들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끊이지 않고 반복되는 고난에 욥도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고,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게 되는 ‘욥의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의로운 자에게 복을 주시고, 불의한 자에게는 재앙을 내리신다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흔들려 버린 것입니다. ‘자신이 의롭게 살아왔는데도 이렇게 아픔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애초부터 하나님이 자신을 노리고 이같은 고난을 주신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욥에게 꽉 차오르게 되면서 그동안 품은 신앙에 회의가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의롭게 살아도, 하나님을 잘 경외하여도 이렇게 고난이 주어진다면 누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집니다. 위의 의문에 답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예’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그러했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우린 자녀들을 향해 댓가를 바라고 사랑을 베풀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행복하기만 하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향해서도 그와 같은 사랑을 드리지 못하리란 법이 없습니다. 자식을 향해서도 그럴 수 있다면 하나님을 향해서도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그와 같은 믿음의 자리에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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