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6절에 보면,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백성들의 속담거리가 되게 하셨다고 했는데, 이 말은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욥의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자신은 근심 때문에 눈이 어두워져 갔고 몸은 점점 파리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정직하다는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에 놀라고 죄가 없다고 여기는 자들이 자기에게로 와서 불경스럽다고 규탄하고 있으며, 의롭다 하는 자들이 더욱 더 힘주어 욥은 잘못되었고 자기들은 옳다고 말한다고 욥이 탄식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자기 앞에 와서 선다고 하여도 그들 가운데서 지혜로운 자를 찾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욥은 주위에 자기를 지지해주는 사람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모두 자기에게 죄가 있다고 수군거리고 비난하는 이들뿐입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욥이 부유했을 때, 많은 재산과 종들을 거느리고, 자식들도 살아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욥을 존경했습니다. 그의 도움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모든 재산을 잃고, 자식들과 종들도 다 죽고, 병들어 몸이 야위어가자 사람들은 욥이 재앙을 당할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힘있는 자, 부유한 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 가난한 자, 병든 자, 고통당하는 자도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욥이 갑자기 재앙을 당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인데, 죄가 없고서야 어찌 저런 재앙을 당할 수 있겠느냐’며 수군대고 있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잘못과 무관하게 어려움을 겪고 있을 뿐이요, 욥의 사람됨은 바뀌지 않고, 욥의 경제적 신체적 상황만 바뀌었을 뿐인데, 사람들의 태도, 친구들의 태도가 달라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무언가 실패한 사람은 삶의 실패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진 것 없고, 약자로 살아가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라고 말들을 합니다. 그래서 아픔을 당한 사람, 실패한 사람, 가난한 사람은 더욱 더 고립되고 고독해지는 법입니다.

이같은 욥을 대하면서 우리는 죄인의 친구로 오신 예수님, 약자들의 위로자로 오신 예수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강자에게 찾아갑니다. 강자의 삶을 잘 산 댓가라고 말해주고,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강자라고 여기는 이들을 찾아가지 않으시고, 오히려 약자에게 진정한 위로와 회복이 필요한 이들을 찾아가셨음을 떠올려 봅니다. 주님이 강자를 좋아하셨다면 우리에게 오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날 엄두도 못냈을 것입니다.

그분이 가난한 자, 죄인, 병든 자, 아픈 자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분을 따라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지 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의 축복은 끊임없이 우릴 통해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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