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9장 1~20절 11월 5일 금요일
빌닷의 말에 욥이 다시 답변합니다. 욥은 친구들에게서 기대했던 말이 나오지 않자 계속 실망합니다. 친구들은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14절 이하를 읽어보면 욥이 느끼는 고독감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으셨고, 그물로 덮으셧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길을 가로막고 지나갈 수 없게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게다가 친척들도 버리고, 가까운 친구들도 잊었고, 나그네와 여종들도 자신을 낯선 사람처럼 대하고, 종은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고 오히려 종에게 애걸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고 말하며, 아내도 자신이 살아있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고, 친형제조차도 자기를 혐오스럽게 여기고 있다고 탄식합니다.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등을 돌리고 있는 상황에 있을 때 자기를 위로하러 온 세 친구들마저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의 죄를 추궁하고 있으니 욥은 어디서 위로를 얻어야 할지 참담한 심정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21-22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호소합니다. “나의 친구여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는데, 왜 너희마저 마치 하나님이라도 된 듯 나를 박해하느냐? 내 몸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아직도 성에 차지 않는 것이냐?”
욥은 친구들에게 위로와 동정을 바라고 있습니다. 가장 친밀한 친구들인 그들에게서 위로의 말 한 마디 바라고 있는데, 오히려 더 찌르고 책망하고 있으니 너무 괴롭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나를 불쌍히 여겨 주는 사람이 없습니까?”라고 호소하는 듯한 그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말을 들으실 때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주시고, 나병환자의 몸을 깨끗하게 해 주시고, 아픈 이들의 손을 만져주신 예수님처럼 그 삶에 긍휼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을 오늘 우리 세상도 찾고 부르고 찾고 있습니다.
어제 남선교사가 보내온 소식에 한 티벳 난민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는 8살된 딸과 아내와 함께 난민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릴 적 승려생활까지 했던 그 형제는 파리에서 복음을 접한 후 이젠 성경교사 역할까지 할 정도로 성장했지만 난민생활은 여유가 없어 주일에도 일해야 하는 상황이어 얼굴 전체에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고 합니다.
주일예배를 드리지 못해 괴로워하는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질 때 100유로를 쥐어 주면서 “이 돈은 너를 위한 돈이 아니다. 네 딸 교육하는 데 사용해라. 어려서부터 말씀을 읽는 아이로 잘 키워라. 그런 아이를 하나님이 복되게 하신다"고 얘기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함께 갔던 티벳 사역자가 “지금까지 누구도 티벳 난민의 자녀 교육을 위해 신경써주고, 용돈 주는 사람이 없었다. 많이 놀랐다”고 말하더랍니다.
조선시대 이 땅에 온 선교사들은 병원과 학교를 먼저 세웠습니다. 교육을 받는 데에는 하인도, 머슴도 백정도 차별을 두지 않았습니다. 신분의 차별 아래 고통 받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놀랐습니다. 그 정신이 어디서 오는지 궁금했습니다.
자신들과 같이 사람취급도 받지 못하는 이에게 교육이라뇨? 그 종교가 어떤 종교인지 모르지만, 백정, 하인, 천민까지 사람취급해 주는 종교라면 무엇을 마다했겠습니까? 죽인다고 해도 두렵지가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사람 취급을 해주는 곳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하물며 신분차별이 존재하던 시대에도 그러하였거늘 친구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그가 비록 죄인이라고 해도 위로부터 해 주는 것이 하나님 믿는 사람의 마음이어야 할 것입니다.
위로하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을 아는 자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그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게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