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친구들은 ‘욥이 재앙을 당한 것은 반드시 죄가 있어서일 것이다’라고 단정하고 있는데, 자신들이 단정해버린 틀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다른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계속 비난의 강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그분이 꾸짖으셨다는 말이냐? 자네의 악함이 큰 것 아닌가? 자네 죄악이 끝이 없는 것 아닌가?” 라고 욥의 재앙의 원인이 욥의 죄악이 크기 때문 아니냐고 추궁합니다.

그러면서 5절부터는 그 추궁이 단정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이유 없이 형제에게 담보를 요구했고, 헐벗은 자의 옷을 벗겼고,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지 않았고,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않았다고 단정합니다. 권세 있는 자에게 땅을 얻었고,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냈고, 고아들의 팔을 꺾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모두가 사실이 아닙니다. 욥이 죄가 있어서 재앙을 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단정해버리고 나니 욥이 그와 같은 죄를 졌다고 말해버립니다. 자기 생각 속에 있던 것을 마치 일어났던 일처럼 말해버리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듣던 사람에게는 기정사실처럼 들릴 것이니, 이는 굉장히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 사회도 가짜 뉴스가 횡행하며 확인 안 된 사실들이 유포되곤 합니다. 그것을 듣는 사람들도 사실 확인하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옮겨버립니다. 그러다보면 사실이 아닌 것들이 사실처럼 되어버리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에 대한 피해는 그걸 유포하거나 옮긴 사람들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이 거론된 사람들이 큰 피해를 당합니다. 때론 생명을 버리는 일도 발생합니다.

그렇다고 퍼뜨린 사람이나 옮긴 사람들이 어떤 책임을 질 수 있습니까? 이미 한 인생이 무너져버린 후인데 사과한들 회복이 되겠습니까?

엘리바스가 욥에게 충고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라. 그리하면 복이 임하리라.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금을 돌로 여겨라. 하나님께 기도하고 서원을 갚아라. 그리하면 네 길에 빛이 비추리라.’

욥이 하나님과 불화하고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말씀에서 벗어나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친구들도 알고 있습니다. 욥도 계속 그것을 주장했지요. 그러나 친구들이 욥의 절실한 호소에 귀를 닫고 있습니다. 이미 ‘욥은 죄인이다.’라고 단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점점 욥의 죄악은 친구들의 입을 통해 커지고 있는 중이기에 욥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란 ‘말하는 자’이기 이전에 ‘듣는 사람’입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듣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일상에서도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도 듣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 들을 때 사람 앞에서도 잘 듣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와서도 듣기 보다 말하는 자가 되어 자기 기도할 것만 간구하고 가는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도 자기 말 위주로 하게 됩니다.

우리 원미교우들은 먼저 듣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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