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욥이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깊은 탄식을 토해내는 말씀입니다. 그 이전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일들을 한꺼번에 당하였음에도 입술로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던 욥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 모습은 슬픔을 내비치지 않고, 마치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모습은 다릅니다. 절망감에 무너져내리는 욥의 마음 상태가 고스란히 표현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경건한 사람이라고 해도 일순간에 자식들과 재산을 잃고 건강까지 잃어버린 상황이 되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3장에 이르러서야 참으로 인간다운 욥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욥이 처한 상황은 이렇게 탄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탄식하고 또 탄식하다 못해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할 수밖에 없는 욥의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어느 부모가 한순간에 자식을 잃고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식들이 혹여라도 자기 모르는 사이에 범죄하였을까 염려하여 자식들을 위해서도 번제를 드렸던 아버지입니다. 그런 욥이기에 자식들의 죽음은 그의 모든 것이 일순간에 무너지는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너무 가슴이 아픈데, 아프다는 말조차 할 수 없을 만한 상황에서 욥은 자신을 부정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차마 하나님을 욕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어서 욥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원망하고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라리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탄식입니다.

이것은 에둘러 하나님을 향해 서운한 감정을 쏟아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태어나게 하신 것이니 출생을 향한 부정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서운함이기도 한 것입니다. 만약 이 표현이 하나님을 향한 서운함이라고 할지라도 저는 너무도 그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아프고 괴로울 때 탄식을 쏟아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당했는데도 오히려 아파하지 않고, 자신은 믿음으로 잘 이겨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위험합니다.

욥은 신에게 찾아온 고난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어 더욱 고통스러웠기에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면 나는 어떠했을까? 생각해보면 생각만으로도 힘들 지경입니다.

그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기도조차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믿음의 동료가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해도 지켜보는 것조차 힘들 것입니다. 함께 울어주고 탄식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탄식으로만 끝나서도 안 될 것입니다. 시련의 한복판에 있는 자는 탄식해야 합니다. 그러나 탄식하고 탄식하되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또한 내 곁의 누군가가 그 시련의 한 복판을 지나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할 수 잇는 최선은 기도일 것입니다. 그저 함께 울어주고 기도해주는 것이지요.

시련의 당사자이든 믿음의 동료이든 성도의 삶에서는 절망과 탄식의 끝에 항상 기도의 자리가 준비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기도의 자리에서 저와 여러분이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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