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 대해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욥이 자신의 무지와 죄를 회개한 말씀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1장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욥을 ‘악에서 떠난 자이며 온전하고 정직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1:9)’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여기서의 욥의 고백을 회개라고 해석하면 욥기를 이해하는 데 오히려 혼란이 생깁니다.

욥이 회개한 것이라면 욥의 죄는 무엇일까요? 회개한다는 말은 있는데 죄의 고백이 없으니 온전한 회개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원문에 기초한 다른 해석을 한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몇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어 그것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3절의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에 대한 설명인데, 이는 욥이 자기 자신을 가리켜 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과응보의 틀 속에 가두어 놓고 마치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해온 욥의 친구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이유에 대해 7절과 8절을 근거로 설명합니다.

7절에 보면 하나님이 엘리바스에게 이렇게 말하십니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욥의 세 친구들을 노하시면서 8절에서는 그들을 ‘우매하다’고 책망하고 계시기에 그같은 해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5절의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는 구절은 친구들에게서 ‘하나님은 이러시다, 저러시다’하면서 친구들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해 들어오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 바라던 하나님을 직접 뵙고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6절의 ‘거두어들이다’는 단어도 원래는 ‘멸시하다, 경멸하다’로 쓰이는 단어라고 합니다. 문장 구조상 수동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니 ‘멸시를 받다’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회개’라고 번역된 단어는, 원문에 ‘나함’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에는 ‘후회하다’는 뜻도 있지만, ‘위로하다’는 뜻도 있으며, 같은 성경인 욥기 2:11, 7:13, 16:2, 21:34, 29:25 등에서는 이 단어를 ‘위로’로 번역했으니 여기서도 위로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말씀은 이렇게 번역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당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 어떤 계획도 당신에게서 막을 수 없습니다. 지식이 없으면서 이치를 가리는 자 누구입니까? 그래서 저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해왔던 것입니다. 저는 제 이해를 넘어서는 놀라운 일을 모릅니다. 제가 말할테니 들어주세요. 당신께 묻겠으니 제게 알려주세요. 저는 당신에 대해 귀로 들어 왔습니다. 이제 제 눈이 당신을 봅니다. 이렇게 저는 멸시를 받아왔습니다만, 먼지와 재 위에서 위로를 얻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의 의미를 하나님이 설명해 주시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그동안 생각해오고 믿어왔던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되고 자신의 그동안의 믿음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받은 것에 위로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해석에 동의합니다.

지금 욥은 재앙의 끝에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면서 그분을 통해 위로를 받고, 모든 재앙을 통해 받은 아픔과 고통을 씻어버리는 위로를 얻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 앞에서 겸허함을 놓치지 않고 살아왔던 욥이었지만, 이 경험을 통해 더욱 하나님을 향해 겸허한 신앙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 삶에 주어지는 의인의 고난에 대해 직접적인 설명을 해 주지는 않으시지만, 우리가 주어진 인생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 묵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을 알아가려는 믿음의 걸음을 멈추지 말고 살아가기를 바라며 여러분 삶에도 눈으로 보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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