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바스는 욥이 당한 고난의 결과만을 놓고 욥에게 죄가 있을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한치의 틈도 없는 인과응보의 사상에 충실한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엘리바스는 자신이 체험한 환상을 예로 들면서 자신의 주장을 계속 증명해 가려고 합니다. 그 환상에서 한 영이 그의 앞을 지나면서 하신 말씀이 17절부터 21절의 말씀이라고 욥에게 전합니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없고, 사람은 창조주보다 깨끗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당신의 종들도 믿지 않으시고 천사들조차 허물이 있다고 하시는데, 흙으로 만든 인간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저 사람은 아침에 살다가도 저녁이 오기 전에 예고 없이 죽음을 보는, 인생을 채 알기도 전에 사라지는 유한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엘리바스가 하는 말은 옳은 말입니다. 우리들 중 인생의 이치를 다 깨닫지 못하고 죽는 이들도 많습니다. 아침엔 살았으나 저녁이 되기 전에 죽음을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 치 앞을 헤아릴 수 없는 유한한 존재가 우리들입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일들에 대해 그 원인을 제대로 아는 경우도 많지 않습니다. 구구절절이 옳은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얘기할 때는 맞는 말입니다만,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욥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말입니다. 욥의 절망을 이해하는 말도 아니요, 그 절망에서 욥을 일으켜줄 소망과 위로의 말도 아닙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엘리바스처럼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옳은 말도 시기와 장소를 가려하지 않으면, ‘옳지 않은 말’이 될 때가 있습니다. 깊은 고난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사람에게는 옳은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총을 맞고 피를 흘리는 병사에게 다가가서 ‘네가 이렇게 총을 맞은 원인이 뭔지 아냐?’라면서 구구절절이 설명하고 이해시키려 하는 것이 부상당한 병사에게 해 줄 조치는 아닙니다. 먼저 그를 치료하고 살려내는 것이 우선입니다.

죄악의 현실 앞에서 그리스도인은 죄를 알리고 책망하는 역할을 해야 하겠지만, 고난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이 할 일은 아픈 이들을 위로하고 주님이 치유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곁에 있어주는 일입니다.

로마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대우받지 못했고, 미천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로마에 심각한 전염병이 돌았을 때, 가족마저 병자들을 버리고 떠났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멸시하던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곁에 머물렀고 버려진 병자들을 돌봤으면 심지어 그들에게서 감염이 되었어도 그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 전염병이 잠잠해진 후 로마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하나둘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자원했습니다.

지금은 아픔의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솟아나오는 사랑과 위로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들의 죄된 현실을 성찰하는 일 또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상처 입은 이들에게는 먼저 그리스도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와 여러분은 이웃들에게 위로자와 격려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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