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는 인생 자체를 고해(苦海)라고 봅니다. 이 말에는 우리의 인생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 중에는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를 외쳤던 전도서가 비슷한 느낌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도서의 ‘헛됨’은 인생 자체가 헛되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하나님에게서 벗어났을 때 오는 것이라는 사실이 불가의 가르침과는 다른 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안에서의 삶은 헛됨이 아닌, 기쁨이요 만족이라는 것을 성경은 알려 줍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도 실상은 ‘안식’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인생을 살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욥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했던 사람도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킨다는 것이 우리의 삶에 고난 없는 안락을 보장해 준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가 안락한 삶과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목적은 안락한 삶이나 행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8복의 말씀을 주시면서 주를 따르는 자에게 주어질 복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그 복이 우리의 목적이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가장 최고의 지향점은 늘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연약함은 고난 앞에 섰을 때 하나님 나라를 놓치게 하기도 합니다.

오늘 욥의 고백을 보면, 그는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자식들도, 재산도, 아내도, 건강도 잃었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그나마 위로를 기대했던 친구들까지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욥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둘 곳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욥 자신의 말대로 그 인생은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품꾼 같습니다. 그러나 품꾼들은 해가 지면 쉬기라도 하고, 때가 되면 삯을 받을 희망이라도 가져볼 만한데 욥은 그런 희망조차 가질 수 없어서 ‘아무 소망이 없이 하루하루를 보낸다(6절)’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7절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생명이 바람같다는 것을 생각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자신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다시는 자신을 볼 수도 없을 것이라고 탄식합니다. 주님마저 자신을 찾으려고 해도 사라져 안보일 것이라고 토로합니다.

구름이 사라지면 자취도 없어지는 것처럼 자신이 스올에 내려가는 사람과 같아 다시는 올라올 수 없을 것이라며 거듭거듭 탄식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욥은 왜 자기 인생이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말하다가 갑자기 하나님께 호소하기 시작한 것일까요?

실상 욥의 마음은 아주 간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도 간절하게 하나님이 희망이 되어주시기를 갈망하는 증거입니다.

욥에게 이제는 하나님 밖에 안 남았습니다. 하나님께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소망을 둘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의 마음은 이런 것 같습니다. 우리는 왜 기도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까요? 우리에게도 ‘하나님밖에 없다’는 절박함이 있기 때문이죠.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 밖에 없다는 심정을 가진 자로서 기도의 자리에 거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그 마음에 위로와, 새 힘을 안겨주시는 은혜가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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