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은 친구 빌닷의 충고에 대한 욥의 답변입니다.

욥은 여기서 친구들도 동의하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말을 합니다. 첫째는 2절에서 언급한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해주시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듯 바울이 롬3:10에서 고백한 바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는 구절을 상기하게 하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3절과 4절, 12-14절에 언급된 말씀에서 유추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행하시면 그에 대해 답변할 자도, 그 행하심에 거스를 자도 없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자기 곁을 지나가신다고 해도 볼 수도 알 수도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자신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주장할 수 없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거스를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욥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있습니다. 욥의 이야기를 따라 읽어가다 보면 욥의 마음이 조금씩 만져지는데, 특히 12-14절 말씀에서는 억울한 감정이 드러납니다. 힘이 센 사람 앞에서 약한 사람이 말도 못하고 당하는 것과 같은 심정임을 살짝 드러내고 있습니다.

15절에서는 자신이 의롭다고 해도 그분이 하시는 일에 감히 대답할 수도 없고,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비를 구하는 것 외에는 없다는 자조섞인 고백도 하고 있습니다. 17절에서도 하나님이 폭풍으로 자신을 치시고 까닭없이 상처를 깊게 하셨다고 말하며 억울함을 또 드러냅니다. 숨돌릴 틈도 없이 괴로움을 채우신다고 하소연합니다.

힘으로 말하면 강한 쪽이 그분이신데 내가 그분을 재판정에 세울 수가 있겠느냐는 19절의 말씀에서는 힘없이 당하기만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깊은 탄식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21절에서 자기가 말했듯이 하나님은 온전한 자도, 악한 자도 다 멸망시키신다고 언급하면서 자신이 죄없이 고난을 당하고 있노라고 친구들에게 다시 한 번 항변하고 있습니다.

욥기 전체도 그러하지만, 오늘 본문만 따로 떼서 설교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하고 당하기만 하는 것 같은 답답함과 억울함이 가득 배어 있기에 말씀을 읽는 우리들도 마음이 아플 정도입니다. 사실 욥기 마지막까지 읽어도 시원한 답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욥이 지닌 의문, 의로운 자가 왜 이유 없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우리에게도 숙제입니다. 욥이 말한대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기댈 수밖에 없는 연약함이 우리에게는 운명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기가 슬프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주님에게 의지하고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 천국에 가서야 다 알 수 있을까 싶지만, 우리가 인생의 의문을 다 해결하고 살아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유한하다’는 말 속에는 우리가 인생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모두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의문의 빈자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가는 것이 어쩌면 성도의 삶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 알지는 못하지만, 내가 살아가는 동안 채워주시는 그분의 은혜를 생각하고 바라보면서 인생에 대해 감사와 감동으로 우리의 삶을 채워가는 것이 유한한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문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대로 남겨두고, 우리의 삶에 은혜를 채워가는 시간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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