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 군중들의 압박에 못 이겨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내어 줍니다. 그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육시라 하였으니, 금요일 정오 즉 낮 12시에 예수님이 넘겨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달리실 십자가를 직접 지시고 골고다에 이르셨습니다. 물론 기력이 다해 더 이상 짊어질 힘이 없는 예수님 대신에 로마 병사는 지나가던 행인 구레네 시몬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만, 자기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던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에 이르셨습니다.

그곳에는 또 다른 두 명의 죄수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두 사람 사이에 세워졌습니다. 두 명의 죄인 가운데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습은 죄인들인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19절을 보니 빌라도가 예수님 십자가에 패를 썼다고 했습니다. 빌라도가 골고다 언덕까지 따라온 것입니다. 그리고 직접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했습니다.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 3가지 언어로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못마땅한 유대 지도자들은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의 자존심에 미천한 시골 나사렛 출신의 청년이 자신들의 왕으로 각인되는 것은 받아들이기 싫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명패는 그 위에 달린 자의 지위를 설명합니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하였다고 기록하여 예수님의 죽음을 격하시키고 주님의 삶을 헛된 것으로 만들려고 끝까지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는 꺾이고 말았습니다.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단칼에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쓸 것을 썼다.” 유대지도자들의 압박에 못 이겨 예수님을 내어준 것이 빌라도로서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에 로마 총독으로서의 책임이 없다는 점을 드러내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빌라도가 예수의 죽음에 자신이 적극 관여했다는 것을 알리려면 ‘로마의 반역자,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썼을 것입니다. 황제에게 반역한 자를 자신이 처형했다는 점을 알리면 황제에게도 위신을 세울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보면 빌라도는 끝까지 예수님의 죽음에 자신의 책임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습니다. 물론 역사는 빌라도의 의도와는 달리 그의 책임이 있었다는 것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어떤 의도로 썼느냐보다 더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패로 인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전 세계에서 흩어져 살던 포로민 출신의 유대인들이 그 패를 보고서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작은 일은 빌라도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록한 것이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보내셨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증해 준 셈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15절을 다시 보시면, 빌라도가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라고 물을 때 대제사장들이 뭐라고 대답하는가 하면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답합니다.

대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가까이 하나님을 대해야 하는 사람들이며 유대교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들 스스로 자기들의 왕을 하나님이라 하지 않고 가이사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왕을 바꾼 자들이 대제사장의 직임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교가 부패할 수밖에 없는 근본 원인입니다.

신앙의 근본이 흔들리는 이유는 우리의 삶의 주인을 바꾸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혀로는 하나님을 주인이라, 왕이라 떠들지만, 삶에서는 이미 주인을 바꾸고 왕을 바꾼 이들이 있습니다. 그 신앙은 필경 썩어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왕으로, 주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분명하고 확고하면 신앙도 삶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이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저와 여러분 이것을 더욱 분명히 하는 인생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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