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말이 중요하지만, 이와 동시에 ‘따른다’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어떤 대상을 인정하고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에 비해 따른다는 것은 마음의 상태를 넘어 행동을 수반합니다.

사실 히브리어에서는 이 둘을 분리하여 사용하지 않습니다. ‘믿는다’와 ‘따른다’는 두 개념을 분리하는 것은 헬라적 사고이지 히브리인들에게 믿는다는 것과 행한다는 것을 하나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것과 ‘따른다’는 것이 하나이지만, ‘따른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모습과 증거들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행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거슬러 행하는 사람들도 종종 볼 수 있기에 우리 시대에서 ‘따른다’는 것을 강조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마다 ‘나를 믿으라’하시지 않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서보다 먼저 기록된 바울 서신들에서는 ‘믿음’을 강조하였습니다. 그 읽는 대상이 헬라사상을 배운 이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믿음’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믿음과 행함을 별개로 여긴 것은 아닙니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하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따르지 않고 믿기만 해도 되는 것처럼 오해한 것입니다. 행함 없는 믿음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자라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는 제자들에게 ‘따를’ 것을 강하게 요청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당신을 배신한 베드로에게 찾아가신 예수께서 그에게 다시 한 번 요구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다른 사람 상관할 것 없이 너는 나를 따르라’. 이것이 베드로에게 하신 마지막 요구이시자 명령이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른다는 삶의 중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국 ‘사람 존중’이라 생각합니다. 베드로에게 처음 따르라 명령하셨을 때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란 사람을 중심으로 여기고 사는 사람입니다. 고기 잡는 어부에게는 고기가 가장 중요하고 고기가 목표입니다.

그러나 사람 낚는 어부에게는 사람이 중심이고 사람이 목적입니다. 누구나 사람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르면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존중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먼저 고려하지 않고, 사람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 종교는 부패한 종교일 뿐입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삼을 때 교회는 진실할 수 있습니다. 법도 제도도 사람이 우선입니다. 흔히 ‘기업이 살아야 노동자가 산다’는 말을 하지만, 주어가 바뀌어야죠. 노동자가 살아야 기업이 사는 것입니다. 국민이 살아야 국가가 사는 것입니다. 성도가 살아야 교회가 삽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희생 제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율법보다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신 것을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실 때 확인했고, 안식일법을 어기면서까지 제자들이 이삭을 베어 먹는 것을 허락하시고, 손마른 사람도 고치셨습니다. 부정하게 되는 것을 아시면서 관에 손을 대시고, 죽은 소녀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본회퍼 목사의 책 <나를 따르라>에 보면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자신의 진정한 삶을 사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행하신 것 같이 행하고, 그가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하고, 그가 용서하신 것 같이 용서하고, 그가 생각하신 것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진정 주님을 따르는 자의 삶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등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