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220장

요한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사귐이 구체적으로 형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주님으로부터 처음부터 들어온 말씀임을 상기합니다.

‘처음부터’라는 말은 주님의 첫 가르침이면서 동시에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없이는 주님 안에 있을 수 없고, 주님과 더불어 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요한은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바 된 존재이며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망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가인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기 때문에 살인한 자가 되었다기 보다는 아벨을 사랑하지 아니하였기에 살인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형제를 미워하는 자가 되고 살인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요한의 이 말씀은 굉장히 큰 속뜻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해하지 않은 것으로 죄가 없다고 여기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요한이 말하는 것은 사랑하지 않음이 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자의 곁을 지나는 레위인이나 제사장은 그에게 해를 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냥 지나쳐 갔기에 그가 죽어가는 것을 방치했으니 요한의 관점에서는 아주 큰 죄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가르치는 사랑은 세상이 말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 이상입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도된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목숨을 버리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들에 대해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단, 사랑하는 삶이란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형제의 궁핍함을 보면서도 도와주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없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많으나 자신의 손을 옮겨 돕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삶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에 ‘진리’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 오직 진리에 의한 사랑만이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사랑의 삶이 하루아침에 우리에게 옷입듯 입혀지는 것은 아닙니다. 날마다 복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서 살아가고자 할 때에 입혀집니다.

물론 우리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는 일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보다 크신 분이시니 그분 앞에서 마음을 굳건하게 하고 살아야 합니다. 계속 한 걸음 한 걸음 그분 안으로 그분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올해 우리가 더욱 그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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